<2 장 고독>
12편 선택의 길
흐름 김휘도
어디로 갈 것인지 어디에 있어야 될 것인지
방향적 감각이 도무지 가늠이 안됩니다.
활실은 당겨졌건만 그 화살이 어디에 가늠되었는지
어디로 쏜살같이 날아가는지 나의 생각과 행동이
어디에 안착을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지금까지 내가 지고 온 생각들
이립지의 뜻도 갑자기 무겁게만 느껴집니다.
어렵지만 그래도 아무런 부담도 없었던 생각들
가시밭 길을 걷는 아픔일지라도
불 위를 걷는 뜨거운 절망이라도
나 자신이라고 스스로 위안 하고
나 자신이라고 스스로 위로하고 격려하며
나의 감정들을 하나 둘씩 단속하고 정리하며
다스리던 생각들 아니 그러한 자각 조차도 아주 희미한
생각들이 어느 순간 흠칫 낯설게 느껴집니다.
어떤 이는 태어나서 눈을 뜨니 천민의 자식이요!
어떤 이는 태어나서 눈을 뜨니 세도가의 자식이라!
어떤 이는 태어나서 눈을 뜨니 호화한 저택이요!
어떤 이는 태어나서 눈을 뜨니 철창 속 새장이라!
절대자께서는 아주 평등하시군요.
누구에게나 단 한 번의 고귀한 탄생을 주셨고
누구에게나 단 한 번의 우아한 죽음을 주셨고
누구에게나 그릴 수 있는 꿈을 주셨고
누구에게나 깨달을 수 있는 마음을 주셨고
누구에게나 살아가는 가치를 주셨으니
이 모두가 이치에 맞는 거겠지요.
이치에 맞지 않다 구요?
이 세상은 공평하지가 못하다 구요?
공평하지 않아서 화가 난다 구요?
나 참!! 이것 보세요!!
화를 내 봐야 당신만 나쁜 사람 됩니다.
그냥 공평하다고 받아 들이세요.
그러면 마음이 편안해 질 겁니다.
작은 톱니바퀴가 큰 톱니바퀴를 움직이게 하듯이
작은 톱니바퀴지만 배움이 적은 사람이지만
진리가 무엇인지 의의가 무엇인지는 알 것이요.
그래서인지 조선사에 혁명이나 운동 등 난이 많이 일어났죠.
보편적으로 중인이나 농민들이 주를 이루었다죠.
물론 승려도 있었고 양반도 가담을 했습니다.
농민이 양반보다 많이 배워서 농민운동을 일으켰을까요?
농민이 양반보다 재산이 많아서 난을 일으켰을까요?
결코 아니지요.
조선후기에는 농민도 돈으로 양반이라는 신분과 벼슬을 살 수 있었으니까요.
농민들이 나라를 믿고 임금을 믿고 관리를 믿고 있었지만
스스로 자각하고 새로운 마음에서 깨달음을 얻은 것이 아닐까요?
이 나라의 주인이라는 깨달음이 있었기에 목숨 걸고 행동하는 것이 아닐런지요?
하지만 조선사의 잘못된 병폐가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는
것에 대해 너무나도 깊은 상도(傷悼) 를 감출 수 없습니다.
역대 우리나라는 이웃나라를 점령하지 않았다고 자부합니다.
예의가 바르고 은근과 끈기가 있는 나라라고 하지요.
학교 다닐 때 그렇게 배웠습니다.
그렇다고 자랑하고 좋아해서도 안된다 생각합니다.
다른 나라에서는 조금이라도 영토확장에 안간 힘을 쓰고 있는데
우리나라는 어떠했습니까?
당파싸움에 세력다툼에 심지어 임금까지 몰아내는
그런 모의에 파묻혀 그런 생각도 못한 거지요.
TV 에 대하 드라마를 봐도 비리가 난무하고 자기 가는 길에
걸림돌이라면 과감히 제거를 하고 역모를 일삼고 누명을 씌우고
눈 앞에 떨어진 이익만을 잡기위한 그런 내용들이 아니던가요?
이런 내용들이 우리나라의 역사 한 장면이라니…….
임금은 주는 밥을 잘 먹고 몸에 좋은 특산품들을 많이 먹어
거짓말 조금 붙이자면 살이 쪄서 혼자서는 문 밖을 못 나갔다지요?
관리는 재산을 모으는데 눈이 멀어 민심이 흉흉했다지요?
백성들의 마음을 못 보고 백성들의 마음을 읽지 못 하고
백성들의 깨달음을 진정 주지 못하였기 때문이 아닐까요?
물론 역사의 몇 획을 그을만한 임금과 관리들이 많았지요.
그 분들이 있었기에 무수히 많이 짚밟히고
수많은 왜구의 침입 그리고 서양의 침입 등
그 많았던 야인들의 침입에도 버텨왔던 것이 아닐런지요…….
임금이 등장하고 백성이 출연하니 한가지 더 얘기하지요
임금이 임금 노릇을 할 수 있는 것은 천지와 백성이 있기에 그러하지요
천지가 없다면 만물이 없을 것이고 만물이 없다면 백성 또한 없는 것이지요.
백성이 없는데 임금이 존재나 하겠습니까?
과거를 다시 돌이켜보면 힘들었던 보릿고개가 흐르는 눈물 속에 묻어 있습니다.
보릿고개의 배고픈 서러움을 극복해준 이를 한 번 돌이켜봅시다.
그는 그의 측근에 의해 총알이 가슴에 박히는 죽음을 당했죠.
백성들의 비어 있는 뱃속에 맛나는 것을 채워줘도 그의 말로(末路)는
비장의 죽음 뿐이었으니까요.
이는 백성에게 먹을 것을 주었으되 마음을 편치 않게 한 결과가 아닌지요.
백성은 배부른 것만을 바라지는 않습니다.
아무리 좋은 음식을 먹더라도 마음이 불편하면
체하거나 토하고 탈이나 게 마련이지요.
백성들은 차라리 적게 먹고 마음 편히 사는 것을 원할지도 모릅니다.
아니 그런가요?
백성은 국민이지만 직장에서는 사원들이지요.
마음이 불편한데 안절부절한데 일이 손에 잡히겠습니까?
먼저 불편한 마음부터 다스려야 되겠지요.
변화하지 않는다는 것은 닫혀진 생각 속에 항상 머물러 있는 사람이지요.
냇물이 흐르지 않고 한 곳에 고여 있으면 오염되어 썩고
결국 늪지화로 진행되어 언제 여기가 냇가였는지 모를 정도로
그 흔적이 사라져 버리기 마련입니다.
이런 과정을 환경 전문용어로는 부영양화라고 합니다.
곧 늪지로 진행한다는 것이지요.
변한다는 것은 닫혀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여는 지각적 사람이라 보여집니다.
곧 스스로 마음을 자정작용을 하는 능동적인 사람이지요.
닫혀진 마음을 가진 사람은 변화 할 수 없는 거지요.
한 가지 더 덧붙이자면 흐르는 물에 발을 씻는 사람은
계속 깨끗한 물에 발을 씻을 것이고 고여있는 물에 발을 씻는 사람은
꾸중 물에 발을 담그고 있는 썩어가는 사람이라고 보여집니다.
당신은 어느 물에 발을 담그고 몸을 담그겠습니까?
아니면 당신은 현재 어떤 물에 서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사람이 살아가면서 슬픈 게 무엇인지 아는지요?
사랑하는 사람과 멀리 떠남도 아니요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하는 것도 아닙니다.
단지 믿는 사람들에게 불신 당 하거나 불신 하는 거지요.
너무 슬퍼서 죽고 싶을 심정일 겁니다.
예를들어 하나 얘기 하도록 하겠습니다.
이 이야기는 조선 초기에 있었던 일이라 알고 있습니다.
한 고을에 우정이 깊은 세 친구가 살고 있었답니다.
오성과 한음을 능가 할 정도로 의가 있었고
서로의 어려운 점과 가정사의 사사로움도 잘 알고 지내는 벗이 였지요.
서로는 말을 하지 않아도 저 친구가 무슨 행동을 할 것이라는
두 걸음 정도는 넌지시 눈에 보이는 격이 없는 동무였습니다.
어느날 세 친구가 주막에 모여서 어떤 모의를 시작 했습니다.
그것은 사리 사욕만 아는 어느 사대부의 집을 털어서 가난한 사람을
도와 주고 힘든 시국을 같이 넘겨 보자는 의견이었습니다.
그 모의에 대해 계획을 하였고 계획된 그날 밤 그들은 성공적으로
일을 마치고 주막에 모여 많은 돈에 대해 어떻게 할 것인지 의견을 나누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백성들 다 같이 배불리 한 번 먹여보자는 처음 생각과 달리
그들은 셋이서 똑같이 나누어 갖자는 어두운 의견을 보았지요.
토론을 많이 나눈터라 밤도 늦었고 해서 한 친구가 목을 축일 겸
집에 가서 술을 가지고 오겠다고 제안을 했지요.
술을 가지러 나간 친구는 집에 가서 잠시 생각을 합니다.
저 많은 돈을 같이 나누려 하니 욕심이 가만히 있지 않았나 봅니다.
그가 생각을 한 것은 독약을 먹여 죽이고 그 돈을 자기가 다 가지려고
계획을 세워 술에다 독약을 넣었습니다.
그 후 그는 그 많은 돈으로 무엇을 할 것인지 생각하며
희뿌옇게 길을 막고 있는 새벽 안개를 뚫고 주막으로 통쾌한 발 걸음으로 갔습니다.
한편 주막에서는 셋이서 나누는 것 보다 그냥 둘이서 나누자 며
서로의 눈치를 보며 그렇게 하기로 합의를 보았지요.
그 친구 둘은 술을 가지러 간 친구를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기분 좋게 술을 가지고 온 친구를 보자마자 둘이서 합작해 목을 졸라 죽이고
그 들은 이제 부자가 된다는 생각에 축배를 들어 목을 축이기 시작했지요.
그 둘 모두 신음을 하며 그 자리에서 죽고 주인 없는 많은 돈만이
우의(友誼) 좋은 세 친구를 갈라 놓고 옆을 듬듬히 지키고 있었답니다.
이 우애 좋은 절친한 세 친구가 여기까지 오게 된 이유가 무엇인지는
말을 하지 않아도 아실꺼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그래도 당신 못 믿어시겠다구요?
슬픔은 이게 아니라 구요?
그냥 가만히 듣고 계셔보세요.
얘기 좀 하게…….
그러면서도 혁신을 주장하지요.
근본이 바뀌지 않고 정신이 바로서지 않고
묵은 때를 깨끗이 씻지 않고 더러운 옷을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지 않았는데
어찌 새로운 혁신이념이란 새 옷을 입으려하는지………!
아무리 배가 고파도 쌀을 그냥 씹어 허기진 배를 채울 수는 없고
아무리 급해도 구두를 신고 양말을 신을 수는 없는 것이지요.
이 때까지 수 많은 혁신활동을 해 오면서
정작 변해야 될 것이 과연 변했는가요?
탁상시계 바늘처럼 그냥 분주하게 돌아가고 있지는 않았나요?
아기의 옹알이 처럼 그냥 듣고 보고 흘러 보내지는 않았나요?
일상 생활에 젖고 타성에 젖어서 새로운 것을 배척하지 않았나요?
혁신이 마냥 실시하는 하나의 행사로 알고 요행으로 접하면서
형식의 틀에 못 벗어나 콤파스처럼 원만 그리고 있지는 않는지요.
혁신은 사람이 늙어가듯 그렇게 늙어가는게 아니지요.
혁신은 얼음이 녹듯 녹아 내리는게 아니지요
혁신은 새로운 길이며 새로운 도약입니다.
기울어지지 않기 위해 넘어지지 않기 위해
한발짝 더 나아가는 것이고 한걸음 더 내딛어 진보하는 것이지요.
오래되어 몸에 익숙해져 있는 습관의 틀을 과감히 깨어
새로운 비젼속에 나를 익숙하게 만드는 것이라 생각이 드네요.
예전에 기업들은 지금보다 경쟁사들이 적고 제품에 대한 수요가
넘치던 행복한 시절이 있었죠.
기업은 무조건 만들어 팔면 이윤이 되었고 그 결과로 질적인 측면보다는
양적인 측면으로만 발전을 추구해 왔다고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덩치만 키운 결과 기업은 효율성은 뒤로한 채 무조건 많이
찍어내기만 하는 기업으로 변화되어 갔고 시간이 흘러 이제는
고객의 만족도가 더욱 다양화되고 다각화되면서 경쟁사 또한 늘어감에 따라
대량으로 만든 제품이 양품이었는데 하루 아침에 불량으로
전략하고 제조 비용보다 더 터무니 없는 금액으로 어쩔 수 없이
팔아야 되는 일들이 생기고 오갈 때 없이 창고에는 불량만 쌓여가고
제때 판매를 하지 못해 창고에 재고로 잠재우다가 제품으로서 가치를 잃어
결국 폐기처분 해 버리는 일이 우리 눈 앞에서 일어나곤 하지요.
인정 받는 기업이라고 할까요… 그런 기업들을 볼 때
그들은 기업의 이윤보다는 먼저 사원과 고객 즉
사람을 먼저 생각하고 고객의 만족도를 먼저 생각하고
사원들의 가족을 생각하며 그 가족의 행복을
먼저 생각하는 자세를 가지고 있다고 봅니다.
분명 제품을 만드는 사람은 백성의 손이며 발입니다.
백성이 행복한 마음으로 즐거운 마음으로 열성을 가지고
열의를 가지고 애착을 가지고 만든 제품을 고객이 믿고 사용할 때
그때 당연히 고객의 얼굴에는 만족이 넘치는 미소가 흘러나오지요.
그럴수록 신뢰는 더욱 돈독히 쌓여져 가고 회사 또한 신뢰성 있는
믿음을 주는 회사로 거듭나고 사원들은 그 만족감에 더욱
심여를 기울이며 개선과 품질혁신에 몰두하고 그 가족들은
든든한 회사를 보고 든든한 가장을 볼 때 흡족해 하고 행복해 하며
삶을 자신감 있게 영위해 나가고 더 나아가 세상을 아름답게
가꿀 수 있는 개인이 되고 가정이 되고 회사가 되지 않을까 합니다.
고객에게 신뢰를 받지 못하는 기업은 생존할 수 없다는 점을
철저하게 인식하고 튼튼한 신뢰의 고리를 연결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고객이 무엇을 생각하고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살펴보아야 겠지요.
고객은 늘 옳다고 말 들을 많이 합니다.
맞는 말이지요. 고객은 판단 기준입니다.
기업이 고객을 신뢰하고 바른 일을 한다면 고객은 언제나 그 기업을 수용할 것 입니다.
고객의 신뢰를 얻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다고 생각이 드네요.
먼저 고객의 불평불만을 조용히 경청한 다음 솔직히 반성한 후 바로 개선하면 되는 거지요.
우리가 흔히 듣는 것 처럼 품질은 좋은데 제품이 팔리지 않는 다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억수같이 내리는 비에 우산을 들고 있으면서도 하늘이 맑다는 말과 같습니다.
뭔가 문제가 있기 때문에 고객들의 반응이 냉정한 것이지요.
고객은 진실하고 믿을만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신뢰를 주면 반드시 그에 따른 긍정적인 반응을 잊지 않지요.
그러나 그들은 한 번 돌아서고 나면 결코 돌아오기가 싶지만은 않을 겁니다.
이제는 양적으로 경쟁을 할 수 있는 시대는 아니지요.
이제는 무조건 단가만 낮추는 실속 없는 시대는 아니지요.
이제는 저 단가를 포함한 우수한 품질을 포함한 대량 생산을 포함하는
이런 컴비네이션 정신이 필요한 때 입니다.
백성들에게 이 컴비네이션 정신을 심어줘야 합니다.
현재 걸어가고 있는 길로 계속 간다면 절벽이라는 것을 가르치고
점심 시간 때 큰 돌이 숨어 있는 밥을 숟가락으로 떠서 밥을 먹고 있는 것을 보고
더 이상 못 먹게 하고 먹으면 자기 몸이 위험해 진다는 것을
가르치고 말려야 합니다. 그것이 올바른 행동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모든 사람이 심각성을 느끼는 시간이 흘렀다면
그것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형태로 변모해갑니다.
우리 몸에 암세포가 다 퍼져 있는데 어찌 살기를 바라는지….
그 종양이 우리 몸에 더 퍼지기전에 조치를 해야 하지요.
스스로 깨달을 수 있도록 해야 하고 돌파구를 찾도록 실마리를 풀 수 있도록
계속 깨우쳐야 합니다.
저단가만이, 최고의 품질만이, 다 생산으로 만들어진 컨비네이션만이 우리가 가야 할 길이고
살아갈 길이라는 것을 인식시키는 것이 중요하리라 생각이 됩니다.
백성들에게 깨우쳐 줘서 이 어려운 시국에 심하게 엉켜있는
여러 형태를 빗으로 빗질하듯 가지런히 놓여지면 좋겠습니다.
찾을수록 길은 더 보이지 않습니다.
들여 다 볼 수록 길은 아득하기만 합니다.
너무나도 어렵게 선택했던 길인데
너무나도 쉽게 좌절하려고 하네요.
지저분한 생각들을 지우고
새로운 것을 담으려고 마음을 비웠건만
비운마음 쉽게 채워지지 가 않습니다.
텅 빈 마음에 이런 저런 생각에 맴돌다
텅 빈 마음 채우려고 그냥 무작정 열심히 살렵니다.
간장종지는 종지만하게… 물 컵은 컵만하게… 세숫대야는 대야만 하게 ….
넓은 바다는 바다만하게… 그렇게 이치에 맞게 살아야지요.
근데 종지로 살 것인지 바다만큼 크게 살 것인지는
다시 깊게 생각을 해봐야 될 것 같습니다.
김휘도의 "내 마음 빈 곳에 무엇을 담아볼까?...."중에서
'시와 산문(창작품)' 카테고리의 다른 글
14편 마음속 꿈 한 조각_김휘도 (0) | 2020.06.23 |
---|---|
13편 슬픔과 고통_김휘도 (0) | 2020.06.23 |
11편 도둑맞는 게 사랑 (0) | 2020.06.02 |
10편 두려움 없는 사랑_흐름 김휘도 (0) | 2020.05.21 |
9편 원칙_김휘도 (0) | 2019.11.13 |